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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 Identity

AI의 기본값에서 벗어나는 법

AI가 펼친 가능성에서 인간의 안목과 판단이 고유한 방향을 만드는 과정을 정리합니다.

AI의 기본값에서 벗어나는 법

관련: Thoughts, AI 시대, 어디까지가 나일까, 증강된 인간

AI는 답을 만들어주지만, 무엇이 좋은 답인지는 결정해주지 못한다.

작성일: 2026-07-15

잘 만들었는데, 왜 AI가 만든 것처럼 보일까

AI에게 아이디어나 디자인을 요청하면 결과의 완성도는 꽤 높다. 그런데 여러 결과를 보다 보면 묘하게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퀄리티가 낮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매끈하고 세련됐지만, 선택이 지나치게 익숙해서 그렇다.

예를 들어 AI에게 이렇게 요청했다고 해보자.

세련된 AI 스타트업 웹사이트를 만들어줘.

그러면 높은 확률로 다음과 같은 요소가 등장한다.

  • 어두운 배경
  • 파란색이나 보라색 그라데이션
  • 중앙에 배치된 큰 헤드라인
  • 반투명한 유리 질감의 카드
  • 둥근 버튼과 추상적인 빛
  • “Transform the future” 같은 문구

각 요소만 보면 충분히 보기 좋다. 문제는 수많은 AI가 같은 조합을 반복해서 선택한다는 데 있다. 그 결과 잘 만들었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이른바 ‘AI가 만든 것 같은 디자인’이 된다.

AI가 실제로 모든 답의 평균을 계산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비유하자면, 요청이 추상적일수록 AI는 학습 데이터에서 자주 등장하고 많은 사람이 그럴듯하다고 느낄 만한 방향으로 끌린다. 실패할 가능성이 낮고, 설명하기 쉽고, 즉각적으로 보기 좋은 선택이다.

따라서 문제는 AI의 결과물이 형편없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선택이 너무 전형적이라는 것이다.

내가 결정하지 않은 부분은 AI의 기본값이 결정한다

사용자가 충분한 방향을 주지 않으면 AI는 비어 있는 부분을 자신이 배운 일반적인 패턴으로 채운다.

이를 간단히 표현하면 이렇다.

사용자가 결정하지 않은 부분은 AI의 기본값이 결정한다.

AI의 기본값은 대체로 많은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기존 성공 사례와 비슷하며, 실패할 가능성이 낮다. 초기 결과물을 빠르게 만들 때는 이런 성질이 무척 유용하다. 그러나 정체성과 독창성이 필요한 작업에서는 한계가 된다.

독창적인 결과는 보통 가장 가능성 높은 선택에서 나오지 않는다. 여러 가능성 중 특정한 이유로 선택한 조금 낯설고 좁은 방향에서 나온다. 그 방향은 데이터의 중심에 미리 놓여 있기보다, 작업하는 사람의 경험과 취향, 문제의식 안에 있다.

AI 시대에 안목이 중요해지는 이유

여기서 말하는 안목은 단순히 더 예쁜 결과를 고르는 능력이 아니다.

안목은 내가 원하는 것과 지금 나온 결과 사이의 미세한 차이를 감지하고, 그 차이를 설명해 방향을 수정하는 능력이다.

AI가 만든 웹사이트가 객관적으로는 멋져 보여도 사람은 다음과 같은 어색함을 발견할 수 있다.

  • 너무 기술 기업처럼 보인다.
  • 실제 서비스보다 규모가 커 보인다.
  • 사용자를 설득하기보다 감탄시키려는 것 같다.
  • 세련됐지만 신뢰감이 부족하다.
  • 우리 브랜드의 조금 어설프고 인간적인 분위기가 사라졌다.
  • 모든 요소가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기억에 남지 않는다.

AI는 처음부터 이런 판단 기준을 알 수 없다. 그 기준은 사용자가 결과를 보고 반응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인간의 역할은 제작 명령을 내리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무엇이 중요한지 정하고, 어색함을 감지하고, 충돌하는 가치 사이의 우선순위를 선택해야 한다.

AI 시대의 차별성은 단순한 생성 능력보다 이런 판단 능력에서 나온다.

좋은 AI 활용은 명령보다 탐색에 가깝다

다음 요청에는 판단 기준이 거의 없다.

웹사이트 디자인해줘.

이 경우 AI는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웹사이트를 만든다. 반면 아래 요청은 곧바로 결과를 요구하지 않고, 먼저 문제를 함께 정의한다.

부동산 위험 분석 서비스를 위한 웹사이트를 만들고 싶어. 기존 핀테크 사이트처럼 지나치게 고급스럽거나 금융회사처럼 보이지 않았으면 해. 사용자는 불안한 상태로 들어올 가능성이 높으니 위협적인 경고보다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해주는 느낌이 필요할 것 같아. 그렇다고 공공기관처럼 딱딱한 것도 싫어. 어떤 디자인 방향이 가능할지 먼저 얘기해보자.

이런 대화에서는 자연스럽게 더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 사용자는 어떤 상태로 방문하는가?
  • 무엇을 느끼게 해야 하는가?
  • 무엇처럼 보이면 안 되는가?
  • 서로 충돌하는 요구는 무엇인가?
  • 기존 사례와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AI가 여러 방향을 제안하면 사람은 다시 반응할 수 있다.

두 번째 방향은 좋은데 너무 공공 서비스 같다. 금융 서비스보다는 믿을 만한 선배가 계약서를 함께 봐주는 느낌이면 좋겠다. 색도 파란색보다 종이 문서나 형광펜에서 가져오면 어떨까?

이런 대화가 반복될수록 결과는 AI의 일반적인 중심값에서 벗어나 사용자의 구체적인 의도에 가까워진다.

핵심은 긴 프롬프트가 아니다

이 이야기를 “프롬프트를 자세히 써야 한다”는 조언으로만 이해하면 핵심을 놓치게 된다. 사람도 처음부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아는 경우는 드물다. 완벽한 요구사항을 먼저 작성하는 것보다, 나온 결과를 보며 자신의 기준을 발견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추상적인 의도 → AI의 제안 → 인간의 판단 → 기준의 구체화 → 수정된 제안 → 고유한 결과

처음에는 그저 “뭔가 별로다”라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AI와 대화하며 이유를 찾다 보면 생각이 더 정확해진다.

나는 미니멀한 디자인을 원한 게 아니라, 정보가 잘 정제되어 있다는 인상을 원했던 것 같다.

또는 이렇게 깨달을 수도 있다.

내가 싫었던 건 화려함 자체가 아니라, 서비스의 실제 규모보다 과장되어 보이는 것이었다.

AI의 첫 번째 결과는 정답이라기보다 사고를 비추는 거울에 가깝다. 우리는 그 결과에 반응하면서 자신도 몰랐던 취향과 의도를 발견한다.

AI가 펼치고, 인간이 좁힌다

AI는 여러 가능성을 빠르게 펼치는 데 능숙하다. 익숙한 패턴을 조합하고, 모호한 생각을 문장이나 이미지로 꺼내며, 많은 대안을 짧은 시간 안에 보여준다.

반면 사람은 무엇이 중요한지 결정하고, 어색한 차이를 감지하고, 버릴 것을 고르고, 결과에 개인적·사회적·문화적 맥락을 부여해야 한다.

그래서 AI 시대의 창작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AI가 가능성의 공간을 빠르게 펼치고, 인간이 안목으로 그 공간의 방향을 선택하고 좁혀가는 과정.

AI 활용 능력은 명령을 잘 내리는 기술만을 뜻하지 않는다. AI가 내놓은 기본값을 발견하고, 그것이 왜 내 의도와 다른지 판단하며, 대화를 통해 의도적으로 수정하는 능력에 더 가깝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AI에게 무엇을 만들어달라고 할까?”가 아니다.

이 결과에서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으며, 나는 왜 다른 방향을 원하는가?

AI는 그럴듯한 답을 빠르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 답이 나에게 좋은지, 이 작업에 맞는지, 무엇을 더 남기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는 결정하지 못한다. 그 결정이 남아 있는 한, 사람의 안목은 이전보다 덜 중요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중요해진다.